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상하게 국사, 세계사에 관심이 가네요. ㅎ
그래서 그냥 깊게는 아니고 간단하게 좀 검색을 좀 했습니다.
앞으로, 문화재를 보고나 역사 드라마를 보면 재미가 더 있을 듯 합니다. ㅎㅎ
조선의 간단 히스토리
- 1392년 7월 17일에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다.
- 1393년 새 나라가 들어선지 몇 개월이 지나도록 나라 이름을 짓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조선’으로 정했다. 이듬해에 수도를 한양(서울)로 정했다.
- 1394년 새 나라를 세운 세력은 맨 먼저 ‘헌 나라’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야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남아 있는 고려 왕족을 모두 살해했다.
- 1395년 개국 공신인 정도전이 《고려사》 37권을 펴냈다.
- 1397년 명나라가 압박을 가해 오자, 조선 정부는 랴오둥(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위협하기 위해서 그랬던것뿐이고, 실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 1398년 왕자의 난 1라운드가 벌어져 정도전이 죽었다. 왕위는 정종에게 넘겨졌으나, 다섯째 왕자 이방원이 실제 권력을 자긴 자로 떠올랐다. 지난해에 동대문이 완공된 데 이어 남대문도 완공되었다.
- 1399년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고려보다 일찍 대외 관계의 노선을 정했다. 다름 아닌 명나라를 따르기로!
- 1400년 왕자의 난 2라운드가 일어나 이방원이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나라 꼴이 제대로 갖춰지기 시작한다.
- 1408년 명나라가 조선의 미녀들을 바치라고 요구해 온다. 조선은 관청까지 설치하고 전국의 미녀들을 수배했다.
- 1417년 개국 초기인데도 관리들에게 줄 녹봉이 부족했다. 그래서 조전정부는 과전(과전법에 따라 관원에게 나누어 주전 토지)을 중부 지방까지 넓혔다.
- 1428년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다. 조선은 일본을 아우처럼 여기려 했으나, 일본은 조선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이 외교 관계를 맺은 일본은 오늘날의 일본 열도가 아니라 주로 쓰시마였다.
-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되어 한글이 처음 빛을 보았다. 나라가 직접 학자들을 동원하여 한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인류 역사상 아주 희귀한 사례에 꼽힌다.
-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다(세조). 세조는 개국 공신들을 새로 임명하고, 《경국대전》을 편찬하게 했는데 오늘날로 치면 헌법 개정 같은 것이었다.
- 1456년 일부 신하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한 사육신 사건이 일어났다.
- 1474년 경복궁과 광화문에 청기와를 얹었다. 그래서 오늘날 대통령 근무처를 ‘청와대’라고 부르게 된 기원이 되었다.
- 1477년 사찰을 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다. 이로써 조선 정부는 불교를 억누르고 유학을 숭상한다는 국가 이념을 확실히 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불교가 크게 유행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유림 세력이 불교 탄압에 압장섰다.
- 1498년 왕이 된 지 4년 동안 잠잠하게 지내던 연산군이 독재로 돌아섰다. 연산군은 정치만이 아니라 문화에서도 독재를 폈다. 한글과 이두의 사용을 금지하는 바람에 한자만 쓸 수 있었다. 연산군은 성균관을 연회장으로 만들어 유학을 조롱했다.
- 1499년 여진족(만주족)이 북방을 침략했다. 고려 때부터 한반도를 괴롭히던 왜구가 점차 수그러진 대신, 여진족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여진족은 만주의 보잘것없는 세력이었지만, 앞으로 100년 뒤면 중국 대륙을 정복하게 된다.
- 1506년 반란이 일어나 풍운아이자 독재자인 연산군이 물러나고, 중종이 왕위에 올랐다. 세조 이후 조선은 또다시 새로 건국된 셈이 되었다.
- 1510년 삼포(웅천의 제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연포)에서 왜란이 일어나면서 일본과의 공식 외교가 끊어졌다. 이루 여진과의 무역도 끊어졌으며, 조선은 일본과 여진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다.
- 1514년 사찰을 짓는 것을 다시 금지하고, 젊은 승려들을 군인으로 뽑았다. 승군(승려 군대)은 그 후 임진왜란 때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정부는 원각사의 건축 자재를 가져다가 군함을 만드는 데 쓸 만큼 불교를 멸시했다
- 1518년 조광조가 현량과를 제안하여 이듬해에 실시되었다. 정부가 바뀌면 기득권층도 바뀌어야 하니까······.
- 1519년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로 끝났다(기묘사화)
- 1522년 왜구와 여진족의 변방 침입이 잦아지자 국방 경비기관인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 1531년 조선 전체 인구가 396만 5253명으로 집계되었다. 조선의 인구는 임진왜란 이후 잠시 줄어들었다가 17세기 중반에 500만 명을 넘어서고, 20세기에는 1000만 명을 넘는다.
- 1559년 우리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적 임꺽정이 황해도를 무대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임꺽정은 3년 동안 활동하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 1575년 일본에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조선 정부 내에서는 붕당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지배층인 사대부들은 궁성 동쪽에 사는 동인과 서쪽에 사는 서인으로 나뉘어 권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 1583년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제안하는 유언을 남겼다(그는 이듬해에 죽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고 하니 10만 군사를 편성하여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붕당정치에 열중했던 지배층은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 1590년 일본이 100여 년에 걸친 전란의 시대를 끝내고 최초로 전국 통일을 이루었다. 집권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실업자가 된 사무라이들을 조선 침략에 투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 1591년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간에 의견이 엇갈렸다.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 한다고 보고했고, 동인인 김성일은 그 반대로 보고했다. 당시 명나라도 심한 붕당정치에 말려 있어서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 1592년 4월 13일 15만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우리 역사상 최대 비극인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선조는 일본군이 북상하자 잽싸게 의주로 도망쳐 버렸다. 5월부터 이순신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해상을 장악했다. 이에 힘입어 육지에서도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관군이 하지 못한 역할을 해냈다. 연말에는 명나라의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 북부로 들어왔다.
- 1593년 평양을 다시 찾고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한양까지 밀려난 다음부터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협상의 주체는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와 일본이었다.
- 1596년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 사신 심유경이 일본으로 거너가 협상을 벌였다. 심유경의 농간에 화가 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침략할 것을 명령했다.
-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했다. 이것으로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났다. 전쟁이 거의 끝날 즈음 이순신이 전사했다.
- 1599년 일본군의 조총에 혼이 난 뒤에야 비로소 조선에서도 총포의 대한 관심이 커졌다. 조선 정부는 사찰에 있는 구리를 모아 총통을 만들었다.
- 1608년 처음으로 경기도에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대토지를 가진 지주들은 대동법을 반대하고 나섰다.
- 1609년 일본의 침략 전쟁이 끝난 지 10년밖에 안 되었는데도 다시 삼포를 일본에 개방했다. 이때부터 조선은 일본에 사실상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다.
- 1618년 2년 전에 세워진 여진족의 나라 후금과 한족 왕조인 명나라가 서로 신경전을 펼쳤다. 어디에 붙을지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갈림길에 있었던 광해군은 교묘하게 줄타기 외교를 펴나갔다.
- 1622년 4년 전에 일본에서 수입된 담배가 금세 널리 펴졌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피우던 담배는 유럽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고, 다시 조선에까지 들어왔다. 오늘날 서양의 인류학자들은, 서양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담배를 서양인에게 퍼뜨렸다는 뜻에서 담배를 '홍인종(아메리카 인디언)의 복수‘라고 부른다. 하지만 담배의 피해자는 서양인들만이 아니었다.
- 1623년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으로 추대하여 정권을 잡았다. 이미 사대부 세력은 왕권까지 간섭할만큼 힘이 커졌다. 그 덕분에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가 무너졌고 결국 후금의 침략을 부른 셈이 되었다.
- 1627년 후금이 조선에 침입했다. 겨우 3만의 적군을 당해 내지 못하고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쳤다. 강화도는 고려 몽골 침입 시기부터 왕실의 단골 피난처였다.
- 1628년 네덜란드의 선원 벨테브레가 일본으로 가던 중 제주도에 난파했다. 이후 그는 ‘박연’이라는 이름을 받아 조선 여인과 결혼하고 조선에서 살다 죽었다.
- 1634년 처음으로 ‘상평통보’라는 화폐가 사용되었다. 상평통보는 1678년 정부에서 공식 인정하는 유일한 화폐가 되어 조선 말기까지 사용된다.
- 1636년 후금이 나라의 이름을 ‘대청’(보통 ‘청나라’라고 부른다.)이라 고치고 중국 정복에 자신감을 보였다. 청나라는 뜨는해, 명나라는 지는 해였는데도 지배층은 여전히 청나라를 오랑캐라 여겨 멀리하고 명나라에게 의지하려 했다. 연말에 청나라가 다시 침입해 왔다. 9년 전의 침입보다 훨씬 규모가 컸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 1637년 인조는 다시 강화도로 도망쳤지만 이번에는 강화도마저 함락되었다. 결국 인조는 청나라 황제인 대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이 해부터 조선은 청나라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 1644년 한족의 명나라가 멸망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국대륙의 주인이 되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여전히 눈이 어두웠던 조선의 지배층은 청나라를 진심으로 섬기려 하지 않았다.
- 1652년 왕자 시절에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효종이 승군을 강화하고 어영군을 설치하는 등 북벌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북벌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 1659년 효종이 죽자, 그 어머니인 대비의 복상 기간을 두고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이것을 ‘예송 논쟁’이라 부르는데, 사대부가 왕족의 예법마저 정할 정도였다는 것은 조선이 완전한 유교 국가임을 말해 준다.
- 1674년 예송 논쟁 2라운드가 벌어져 남인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 1693년 용감한 어부 안용복이 일본정부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임을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 1725년 붕당정치 때문에 즉위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던 영조가 그 폐단을 막기 위해 탕평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대부 세력을 위축시켜 왕권을 강화한다는 측면도 있었다. 그 덕분인지 영조는 52년 동안 조선 역사상 최장기 집권을 누리며 많은 업적을 쌓았다.
- 1751년 균역청이 설치되고 균역법이 시행되었다. 임진왜란 후 백성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군역(오늘날의 병역)이었는데, 균역법은 이 문제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균역법은 탕평책과 함께 영조의 2대 업적의 꼽힌다.
- 1754년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이것을 황구첨정이라고 한다.
- 1762년 왕(영조)이 아들인 세자(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 배경에는 붕당정치가 있었으니, 이제 붕당정치는 왕위 계승권자까지도 죽일 만큼 나라를 망칠 정치 현상이 되었다.
- 1768년 토지 대장에 등록되지 않은 토지(은결)를 대대적으로 조사했다. 은결은 탈세가 이루어지는 바탕이 되었는데, 주로 대지주들이 소유했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안 내려고 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 1776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붕당정치를 완전히 끝내야 한다는 공적사명과,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는 사적 사명을 안고 있었다. 정조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다운 왕이었다.
- 1785년 ‘장용영’이라는 군사 기구가 설치되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특전대 사령부와 같은것으로 왕의 친위 부대였다.
- 1796년 수원성(오늘날 화성)을 쌓았다. 정조는 이때 조선의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려고 했던 듯하다.
- 1800년 개혁 정치를 실시했던 정조가 마흔여덟 살 나이로 죽었다. 붕당 세력이 정조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 1801년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천주교도를 찾아내기 위해 ‘오가작통법’이라는 제도까지 생겨났다.
- 1805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붕당정치보다 더 저질스런 세도정치는 이후 60 여년 동안 이어졌는데, 하필 이 시기는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동양을 집어삼키기 위해 몰려드는, 국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때였다.
-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중앙 정치가 세도정치로 썩어 가는 가운데 전국에서 민란들이 잇달았다.
- 1818년 천주교도로 몰려 유배 생활을 하던 실학자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완성했다. 이때부터라도 이 책에서 가르치는 대로 정치가 이루어졌더라면 조선 말기의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 1832년 영국 상선 애머스트 호가 황해도 몽금포 앞바다에서 통상을 요구했다. 역사상 최초로 서양인이 공식적으로 통상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 1842년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함으로써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노골적으로 침략해 오기 새작했다. 조선 정부는 여전히 국제적인 정세는 커녕 국내의 정세마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 1845년 조선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방침을 바꾸어 조선인을 신부로 만들기로 했다. 상하이에서 단기간에 신부가 된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조선으로 밀입국했다. 그는 선교 활동을 하다가 이듬해에 체포되어 처형 당했다.
- 1854년 일본이 군함을 앞세우고 접근한 미국과 첫 외교 조약을 맺고 문호를 열었다. 이로부터 20년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제국주의적 발전을 이루고 한반도 침략을 노리게 된다.
- 1862년 진주에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다. 중국의 서양 세력에 굴복하고 난 뒤 구심점을 잃은 조선 정부의 무능력에 백성들은 민란으로 항의했다.
- 1863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60여 년간의 세도정치가 끝났다. 이후 10년 동안 이하응은 외세에 침략에 맞서 철저하게 쇄국정책을 펴 나갔다.
- 1866년 연초에 서양인 신부들과 조선 천주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다(병인박해). 여름에는 미국의 상선 저너럴 셔먼 호가 평양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고선 관군과 충돌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병인양요). 이 사건을로 조선의 정부와 백성들은 서양 열강에 다한 경각심을 더욱 높였다.
-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이하응의 아버지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했다.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를 오페르트는 1881년 런던에서 조선을 서양에 소개하는 책 《금단의 나라》를 써서 약간이나마 속죄했다.
- 1871년 미국 군함 다섯 척이 강화도 앞바다에 와서 통상을 요구했다. 이들이 당국의 허가 없이 무단으로 상륙하자 조선관민과 충돌했다. 이 전투에서 관군 80여 명이 전사했다(신미양요).
- 1873년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자, 아버지 이하응은 권력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종은 왕비인 민씨 세력이 조종하는 꼭두각시였으니, 결국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밀려난 꼴이 되었다. 이하응의 독재도 문제였지만, 모든 문제에 무능력한 민씨 세력은 더 문제였다.
- 1875년 일본은 서양 열강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운요호라는 군함으로 강화도 앞바다에서 위협 사격을 해 왔다.
- 1876년 서양 열강은 계속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 집적거리다가 실패했지만, 일본은 단 한 차례의 시도로 성공했다.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삼아 일본은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켰다. 어차피 개항될 거라면 차라리 일본보다는 서양 열강에게 개항하는 게 나을 뻔 했다.
- 1882년 봉급을 못 받은 군대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일어나, 이하응이 다시 권력을 잠깐 잡았느나 얼마 못 가고 무너졌다(임오군란).
- 1883년 태극기가 국기로 정해졌다. 당시의 태극기는 오늘날의 것과는 모양이 달랐다.
- 1884년 일본의 지원을 받은 개화파가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으나 3일만에 무너졌다(갑신정변). 일본, 청나라, 러시아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여 이 무렵 조선의 정치는 더할 수 없이 불안했다.
- 1885년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했다. 영국군은 러시아 한만도 진출을 막기 위해 거문도에 2년 동안 주둔하다가 철수했다.
-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 동학교도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갑오농민전쟁). 이 사건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와서 전쟁을 벌였다(청일전쟁). 중국과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300년 만에 다시 한반도에서 맞붙었다.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했다. 일본의 조종을 받아 김홍집 내각이 개혁 정책을 시행했다(갑오개혁).
- 1895년 일본의 깡패들이 조선 왕궁에까지 침입하여 민비를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을미사변).
- 1896년 일본보다 러시아를 더 좋아하는 세력의 책동으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아관파천). 한 나라의 왕이 제 집(왕궁)을 나두고 남의 나라 공사관에 가서 1년동안이나 살 정도로 나라 꼴은 말이 아니었다. 나라 꼴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최초의 민간 정치 단체인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처음으로 한 일은 엉뚱하게도 독립문을 건설하는 것이었다(이 독립문은 오늘날 자리를 약간 옮겨 남아 있다).
-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 조선은 왕국에서 제국이 되었고, 고종은 왕에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모양새만 그럴듯 할 뿐 사실은 속 빈 강정이었다. 대한제국은 일본과 러시아의 조종을 받는 허수아비 제국이었고 고종은 바보 황제었다.
- 1890년 전기,전화,철도,영화 등 서양의 선진 문물들이 일본의 의해 조선에 소개되었다.
- 1904년 10년 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가 떨어져 나간 뒤부터 조선에 영향력을 부리는 나라는 일본과 러시아였다. 두 나라는 승부를 내기로 결정했다(러일전쟁). 다행이 이번에는 무대가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였다. 이 전쟁에서도 일본은 예상을 깨고 승리했다.
- 1905년 청나라와 러시아를 물리친 일본은 사실상 한반도의 주인 행세를 했다. 11월에 일본은 조선의 매국노 지배층과 을사조약을 맺었다. 분노한 조선 백성들은 이때부터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저항했다.
- 1909년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 정치인으로 을사조약을 이끌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시들어 가는 국운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일본은 곧 조선을 합병할 계획을 가지고 의병 운동을 대대적으로 진압해 나갔다.
- 1910년 일본과 조선의 매국노 지배층 사이에 조선과 일본을 합병한다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519년 사직을 역사속으로 던지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뭐...맞는 것도 틀린 것도 있겠지만... ㅎ
조선 왕조 계보